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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

심양에서의 생활과 세자빈 강빈



소현세자 일행은 1637년 4월10일 청의 수도 심양에 도착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내외와 수행원들은 볼모 기간 8년동안 심양관소, 즉 심관에 거쳐하였다.
세자빈은 청나라에 있으면서 원손 밑으로 2남4녀를 낳았다. 자녀들은 조선에서 길러졌고 1640년 세자가 귀국할 때 대질로 원손 석철이 심양으로 왔다.
1644년 청이 명의 수도였던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자 북경으로 따라가서 3개월간 머물렀다. 이 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천주학고 서양 과학기술을 접하게 된다. 1644년 11월 26일 순치제의 명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1645년 2월 17일 벽제에 도착한 후 4경 말에 세자빈이 먼저 서울로 향해 떠나고, 세자는 이튿날 도착한다.

심양관에서 세자빈은 안주인 역할을 하였다. 세자가 황제의 명에 따라 사냥에 참가하거나 명을 공략하기 위해 종군을 하기 위해 관소를 비우게 되면, 관원들은 빈궁에게 문안하고, 관소의 일을 봉림대군과 의논한 후 세자빈에게 보고하여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세자와 봉림대군이 모두 관소를 비운 경우, 세자빈이 대신하여 관소의 최고책임자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상층여성이 때에 따라 남편을 대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례는 귀국후 인조의 의심을 받고 대역 죄인으로 몰리게 되었을 때 문제가 되었다.

심양관의 생활은 궁핍하였다. 청에서 대주는 식량과 물품은 충분하지 않았고, 조선 조정에서 보내오는 물자도 늘 부족하였다. 청은 붙잡아 온 포로들을 성문 밖에 모아놓고 시장을 열어 팔기도 하고 포로를 속환하라고 높은 몸값을 물러 떠넘기기도 하였다.
각종뇌물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청의 장수와 역관에게 많은 재물을 빼앗겼다.
청이 밭을 주자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세자빈은 황실이나 귀족 연인들과 교류하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북경에서 아담 샬과의 만남과 귀국
1644년 명이 멸망하고 청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자 소현세자와 세자빈도 북경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천주교 신부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과 교류하여 서양의 최신 과학기술을 접하였다.

인조의 의심

소현세자가 머물던 심양관은 조선 정부를 대리하는 대사관역할을 하며 모든 연락사항을 관장하였다. 세자는 청나라 황제와 고관들과도 접촉을 갖고 양국의 관계유지에 원할을 기하려 했으나, 당시 조선 조정 내에는 존명대의(尊明大義)명분아래 반청(半晴)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인조는 점차 세자의 대청(對淸)태도에 불만과 의심을 나타냈다.

인조실족의 기사(1636년 2월)는 흉노에 붙잡힌 소무가 저항했던 것처럼 소현세자가 고난의 생활을 하기를 바랐을까?
또 인조에게 만약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면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겠다고 청태종의 말에 불행의 종류가 인위적인 폐위로 이어질 가능성에 불안했을 수도 있다. 심양관의 소현세자를 인조는 의심했을 수도....

청이 소현세자를 인질로 잡은 근본적인 이유는 대명단절, 친명입장등의 정치,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요구사항도 있었다. 따라서 심양관에서 조선 정부에 요구하는 물품은 점차적으로 늘어났으며,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청의 요구사항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조선에 전달하는 심양관의 태도에 불만이 높아갔다. 조선 정부의 물반은 국론 분열의 양상을 보였고, 심기원사건으로 폭팔하였다. 인조는 강력한 반청 분위기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반청분위기를 감지한 청은 조선파견부대의 교전에 세자를 동참시킬 것을 결정하였고 심양관의 입장을 배제한 최명길의 친명활동은 대청관계의 약재로 작용하였다.
이런 조선과 청의 관계는 청 태종의 죽음으로 변화를 맞이했다. 청 태종의 죽음이후 구왕다이곤이 정권을 장악했다. 심양관에 우호적이었던 구왕의 등장은 심양관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세자 일행의 조선 귀환을 성취할 수 있었다. 세자의 귀국은 대청관계에서 미묘한 위상을 정하던 소현세자가 국내정치에 전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인조는 패전 군주라는 오점과 함께 심기원 모반사건에서 보듯 군주권을 위협받고 잇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이 자신을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내세울 가능성을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조의 의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발생했다. 1644(인조 22)1월 세자는 돌아가신 장인 강석기의 조문을 위해 세자빈과 함께 일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친상을 당한 세자빈이 친정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귀국한 세자는 백관의 하례도 받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의 귀환과 의문의 죽음
청은 북경으로 천도하고 1645년(인조 23) 세자 내외를 조선에 귀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볼모로 잡혀간 지 8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세자 내외에 대한 인조의 태도는 적대감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청나라에서 세자에게 전위(轉位)하도록 압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와 함께 부왕의 기대와는 달리 세자의 친청적(親淸的) 태도, 귀국 시 비단, 황금 등 많은 재물을 가져온 점, 특히 임금의 총애하는 조씨와 세자빈의 반목 등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궁내의 반목과 무고(誣告)가 끊이지 않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세자는 귀국 2개월 만인 1645년 4월 26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하였다. 학질로 보이는 병을 앓다 침으로 치료하던 중이였다. 당시 어의였던 이형익은 조씨의 집안과 관련있는 자였고, 의레 행해지던 의관에 대한 논죄가 인조의 완강한 거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임금의 의도를 간파한 조씨측의 사주로 독살 당했다는 설이 유력하였다.

인조는 입관을 서두르고 제자빈과 대신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장례도 간소히 치뤘다. 10살이던 원손을 왕위로 계승자로 삼ㅈ던 상소도 각하되고, 마침내 인조는 조정의 공론을 무시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시켰다.

소현세자빈, 모함 끝에 사약을 받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하였다. 세자빈은 조씨의 무고로 조씨에 대한 저주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다. 원손의 보모인 최상궁을 비롯하여 강빈을 따르는 궁녀들이 처형당했고, 세자빈의 친정 형제, 자매들도 유배되었다.
1646년(인조 24) 1월 3일 임금님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세자빈은 2월 12일 세자빈 폐출을 지시하였고 3월 15일 세자빈의 친정으로 보내 사약을 내려 죽였다. 아들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두 아들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 후 금천강씨는 멸족의 위기에 처해졌다. 그러나 세자빈을 불쌍히 여기는 민심은 확산되었고 세자빈 신원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강빈 사사된 지 73년이 흐른 숙종 44년에 위호를 복위시키고, 시호는 민회라 정해 신원시켰다. 민회빈 강씨의 묘소는 처음 민회원이었다가 고종 40면 영회원으로 개칭하였다. 강석기의 관직도 복위되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신원되었다.

소현세자빈 강씨에 대한 후대의 평가
강빈은 총명 유능한 여성으로 평가되었다.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이기 때문에 강빈의 부분은 미약하다. 따라서 병자호란기의 심양관은 주로 소현세자 연구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2008년 심양일기와 심양장계가 번역되면서 심양관의 세자와 세자빈의 삶을 역사속에서 현대로 불러내는 기초 작업이 마련되었다.
민회빈 강씨는 국가적 불행으로 타의에 의해 청나라에 끌러갔지만 왕궁과 조선 밖에서 생활하게 되는 최초의 왕실 여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히 외국에서 살았다는 의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민회빈 강씨은 조선 왕실 여성의 한계를 넘어 넓은 세계관을 배우고 변화된가치관을 통해 변화를 실천한 여성이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의 구별 속에서 최고 신분인 왕실 여성이 농사를 짓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으나, 그 꿈은 불행히도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